몇달전까지만 해도 미국 인턴으로 오는건 여러가지로 너무 비추한다고 글을 쓰기도 했었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바이러스와 여러가지 불경기로 인해 많은 젊은 청년들이 힘들어하는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정치하는 인간들은 대통령을 포함해 언제나 말만 뻔지르르하고, 결국 처음 청년들을 위해 하겠다고 한것은 하나도 없는거 같네요. 

한국과 미국에서 살아보고 직장생활도 다 해본 사람의 경험을 비추어 볼때, 미국은 그렇게 큰 메리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부분에서 한국의 물가가 비싸지고 어느부분에서는 미국과 비교했을때 비싼 부분도 있지만, 결국 전체적으로 따져보면 미국의 생활비는 한국의 2배이상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집 월세부터, 식료품, 식당 음식 가격등등...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 기회라도 더 넓은 세상을 위해 나가는게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진짜 별거 없습니다. 하지만 그 별거없는게 왜 별거 없는지 와서 체험해봤으면 합니다. 누가 뉴욕에서 대학교를 나왔다, 어디 미국 대학을 나왔다, 이런거 한국에서 보면 대단하게 보일수도있습니다. 물론 졸업하기까지 노력도해야하긴 하겠지만, 한국에서와 같은 경쟁과 노력에 비하면 진짜 별거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단 1년의 인턴이라도 미국에와서 체험해보면, 미국이 아니라도 캐나다나 호주 든,  한번도전해보세요.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그런 기회도 잡기가 어려울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번해보세요. 

한번 두번 해보다보면 그만큼 생각이 넓어지고 길이 보일수도있습니다. 

오늘은 여러가지 인턴으로 도전할수 있는 사이트 몇개 공유 하려고 합니다. 

물론 제대로 된 포지션을 찾는 건 본인 몫입니다. 어떤 회사든 신중하게 알아보고 뒷조사를 정확하게 다 해보고 지원해야합니다. 요즘엔 정말 절박한 사람들에게 사기치는 인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미국에도 마찬가지로..

 

첫번째는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입니다. 이곳은 미국뿐아니라 여러가지 인턴쉽이나 취업등 다양한 포지션을 찾아볼수있습니다. 아마 다른 미국인턴관련 사이트들도 다 여기를 통해 가지 않나 싶습니다. 

www.worldjob.or.kr/advnc/cnttNewList.do

 

일자리 찾기/ 지원하기 - 해외취업

[KOTRA] 러시아 KEB 하나은행 러시아ㆍ그 외 전문서비스 관리자 무관 대학(교) 졸업 연봉 2,804 ~ 2,804 만원 [ 정규직 ] 취업비자 조회수 10 명 스크랩 0 명 05/21(금)

www.worldjob.or.kr

두번째는 미국내에서 한인들이 많이 쓰는 커뮤니티 사이트입니다. 물론 미국내 거주자가 대상이라 비자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한국에서 건너오는 구직자는 안받아줄 가능성이 크긴합니다. 하지만 안받아줄땐 안받아주더라도 이력서 이메일로 하나 날리는건 어렵지 않으니 한번 찾아보라고 공유합니다. 

heykorean.com/

 

헤이코리안 - 해외 생활의 모든 것

 

www.heykorean.com

www.radiokorea.com/

 

라디오코리아

RadioKorea AM1540 KMPC 라디오코리아 우리방송, 우리채널, 미주 최고의 한인방송, 최대 한인 커뮤니티

www.radiokorea.com

또한가지 방법은 그냥 무식하게 검색창으로 찾아보는 방법입니다. 그럼 한국에서는 한국에서 모집하는 미국 및 해외 인턴쉽관련 정보들을 많이 보실 수있을겁니다. 

kr.indeed.com/%EB%AF%B8%EA%B5%AD-%EC%9D%B8%ED%84%B4%EC%A7%81-%EC%B7%A8%EC%97%85?vjk=72484da987b18074

 

2021년 4월 미국 인턴 취업, 일자리, 채용 | Indeed.com

미국 인턴 취업정보 1페이지 결과 49건 월드인턴 서울 서초동 연봉 37,700,000원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시행됨에 따라 채용정보에서 연령이 삭제되었습니다. 국가

kr.indeed.com

신중하게 잘 찾아보고 많은 기회에 많은 도전을 해보세요. 

인생은 그저 죽을때까지 도전인거같네요. 

다른 구체적인 질문이 있으시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제가 아는것, 찾아볼수있는것 총동원해서 알려드릴수있어요. 

실제로 현재 미국으로 인턴쉽으로 온 분들과도 같이 살고있으니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드릴수 있습니다.

또한 IT개발자로도 일하고 있으니 그쪽으로도 많은걸 알려줄수있습니다.

ps. 오면 백신도 맞을수있습니다. 

맞건 안맞건 본인이 스스로 결정할 수있어요. K방역 한국과는 다르게...

오늘도 오랜만에 한글자 적어봅니다. 

우선 하고싶은 말을 하기전에 현재 20대 젊은 사람들한테 한사람씩붙잡고 이야기 해주고싶네요, 호주던, 캐나다던, 미국이던, 동아시아를 벗어나서 워킬홀리, 인턴으로 더 넓은 곳으로 나가보라고..

코로나때문에 무서워하지말고, 새로운 환경을 무서워하지말고 기회를 찾아 나가라고 얘기해주고싶습니다. 

 

위, 아래로 나라에 대한 안위를 위협받고 있고, 짱깨라 불리는 나라는 돈으로 안에서부터 야금야금 먹어가고있는데, 

좌우를 가리지 않고 정치하는 놈들은 그저 손바닥으로 가리면 다 가려지는 줄알고 하나같이 사람들을 속이려고만 들고, 특히나 얼마나 무식한지 가늠도 안되는 노인내가 도지사를 한다 정치를 한답시고 안그래도 작은 나라안에 작은 짱깨촌을 만든다 어쩐다 개소리나 씨부리고 있는 그런나라.... 세상에서 가장 살고싶은 지역중에 하나인 제주도를 뇌가 없는 것들이 뭘 어떻게 결정했는지 무비자를 만들어서 다 망쳐놓고, 현재진행형으로 나라가 야금야금 사라져가고있는줄도 모르는 병신들... 

나라의 진짜 보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인지 그냥 관심이 없는 것인지... 대통령 줄을 잘서서 능력도 안되는데 한자리씩 꽤 차고 있는 패거리들은 무엇하나 해결한 문제가 없고.. 

그저 약한자 코스프레를 하며 선동을 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면 범죄자인양 상대방을 몰아가는 정부 대가리들. 

하나하나 다쓰면 몇페이지를 써도 모자랄거 같네요..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글을 쓰는게 아니라 이런 이야기는 이만 줄이고, 진짜롤 하고 싶은이야기를 적어봅니다. 

 

나이가 하나 둘 더 먹어가고 벌써 30대 중반을 지나 후반을 향해 가고있습니다. 거기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자식도 생기고 하다보니, 깨달은 것이 결국 한 나라에 가장 중요한 보물은 결국 한 나라의 다음 시대를 위해 준비되고 지탱하고 지킬수 있는 젊은 사람들.. 거기에 그 다음세대인 젊은 사람들이 낳는 아이들.. 이 첫번째로 중요한 보물인거같습니다. 결국 현재 가진 기득권들, 기성세대들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다 해쳐먹고 다 망쳐버린다면 다음세대에겐 기회도 안올수도있고, 젊은세대 스스로 기회를 만들필요도 없어지니까 그대로 나라가 망해가는거같습니다. 

맨날 애를 안낳아서 출산율이 최저다 어쩐다하는데 그건 젊은 세대의 잘못이 아니라 젊은세대를 힘들게 만드는 50대 이상의 권력층, 특히 그냥 정치질만하는 것들이 이렇게 만들어놓은거같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때, 그리고 대학교때, 그저 아무것도 안한 잉여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뭐라도 해보려고 다 해보고있습니다. 아마 40이 되어도 계속 도전할 거같습니다. 왜냐하면 잉여인간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요즘 20대 초중반 이제 막 사회에 나와서 있는 스펙 없는 스펙 다 쌓아가며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 알아주는건 그중에 진짜 금수저 엘리트코스를 밟은 소수의 사람이나, 그냥 머리가 너무 좋아서 좋은대학, 이시험 저시험 다 통과한 소수의 사람들뿐입니다. 

그 이외에 평범한 사람들이나 저같이 평범에도 끼지못하는 사람은 그저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살아야 겨우 사회생활하면서 살아갈수 있는 수준... 수도권에는 집도 못하는 형편으로 결혼은 꿈도 못꿉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이야기 해줄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하는 그 만큼의 노력으로 눈을 조금만돌려 조금 넓게 세상을 바라보면 기회는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내가 살아온 환경이 아닌 외국에서 사는것또한 외롭고 힘든건 매한가지입니다. 하지만, 진짜 장담하건데, 한국에서 경쟁하는 것보단 훠~~~~~~~~~~~~~~~~~~~~~얼씬 많은 기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 말하고 싶은건,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떠나서 새로운 곳에서 한번 다시 개척해보세요. 물론 여러가지 실패를 할수도있지만, 그저 한국에서 자기네들은 학벌을 안본다 블라인드면접이다 이딴 헛소리 거짓말들을 듣는것보단 훨씬 가치있는 도전이 될겁니다. 

이런장면이 바로 가장 중요한 보물이지 않을까요. 그저 기득권이 되보려고 한표한표 구걸하는 인간들보다..

기존세대보단 다음세대, 그리고 그 다음세대..로 이어져야 할 것들을 현재 그 한표 구걸하는 그지들이 다 쳐먹으려고하니..

뉴욕 별거 없어요... 그냥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습니다. 하지만 한국보다는 더 많은 기회가 있을 수도있습니다. 미국에 인턴으로 도전하든지 캐나다나 호주로 워킹홀리를 가던지 기회가 되는 곳으로 도전하세요.

그럼 이렇게 맞고싶을때 백신도 맞을 수도있고, 맞기 싫으면 안맞아도되고.. 이런게 바로 자유아닐까요. 그저 K방역이 어쩌고 하면서 말도 안돼는 소리 지껄이는거보다.. 물론 몇몇은 이미 다했으니 자랑한다고 비아냥 거릴수도있을수도있겠네요. 뭐 자랑으로 받아들여주면 감사하고, 저도 아직 내집없어서 기러기로 살고있습니다. 그래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연락주세요, 미국으로 인턴오면 밥한끼 사줄수있습니다. 

첫번째직장근처

안녕하세요, 이전에 "N포 남자가 결혼까지"를 작성 후 꽤 시간이 지나갔네요. 여러가지로 또 사는게 바쁘다보니 조금 늦었습니다. 

이번에는 결혼 후, 한국에서 살다가 이민을 가게 된 계기.. 그리고 이민을 가고나서 정착하기 까지를 조금 적어보려고 합니다. 

물론 저는 캐나다에서 아내 만나 많은 사연을 거치며 혼인신고까지 했습니다. 물론 아직 결혼식까지 올리진 못했습니다. 모아둔 돈도 없었고, 미국과 한국에서 여러가지 행사 준비를 하기엔 능력이 너무 부족했었습니다. 그래도 아내가 서로의 상황을 다 이해하고 같이 해쳐나가는걸 다 이해해줬습니다. 물론 결혼하자고 한건 아내가 먼저 했지만...

그래서 혼인신고 후, 여러가지 서류를 발급받고 번역하고 여기저기 어떻게 해야는지 많은 블로그와 정부 사이트를 뒤져가며 하나, 둘 서류를 준비하고 한국에서 살기 위한 F-1비자였던거같네요. 배우자 비자... 물론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고생했었는데 또 금새 잊어버렸네요. 

그래서 한국에서 살다가 여러가지로 준비가 되면 미국가서도 살자고 그렇게 약속으로 하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물론 살집 구할 돈이 없어 어머니가 계신집에서 얹혀 살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작은 집이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일하며 한푼이라도 벌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또 잘 안되더라구요... 지금생각해도 돈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집에만 있기 심심하고 지루하니 한국어교실도 다니며, 영어강사로 일도 해보려고 여기저기 지원했지만, 서양사람이 아닌 아시아인이라 지원하는 곳마다 아에 답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한국학원은 제대로 된곳이 없구나.... 다 쓰레기같네 라고 느꼈던거같습니다. 물론 안그런곳도 있었겠지만, 마침 아내가 지원하는 곳들은 다 그런 곳이었나봅니다..

이래저래 한국생활좀 즐길수있게해주려고 주말이나 쉬는날 여기저기 놀러가려고 노력했었는데, 마침 10개월째 드디어 저한테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어렵게 얘기를 꺼내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뭐 설득이고 자시고 할거없이 그냥 알았다고 그럼 미국으로 가자고 얘기하고 바로 미국가는 비행기표를 끈었습니다. 

또 그리고 떨어져 지낼순 없으니 미국에서 비자 받을 방법을 찾아봤습니다. 물론 배우자비자로 영주권을 받는 방법이 있었는데 준비할 서류들과 과정들이 한국비자 받을때보다 몇배는 더 힘들었던거같습니다. 물론 미국으로 같이 가서 장인 장모께 결혼허락을 받고(이미 신고해버렸지만....;; 그때까진 모르셨음...;;;) 다행이 특별한 반대없이 찬성해주시고, 와이프는 거기 남아서 일을하고 저는 혼자 돌아와서 비자 서류와 준비를 하며 저도 프리랜서로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보통 결혼이민비자를 받을때, 진짜 좋아서 결혼했다는 증거를 제출해야하는데 저희는 편지 사본들과 사진들과 사진의 날짜 등을 첨부하여 제출했는데 큰 문제 없이 통과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대사관에서 인터뷰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깜짝 놀란일이있었습니다. 

어떤 어르신이 미국인과 인터뷰를 하고있었는데 어르신이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시자, 갑자기 그 미국대사관 직원이 미국말투로 "할머니, 영어 못하쉬면 한국어로 할까요?" 라고 맞춰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르신도 무사히? 미국대사관 직원과 한국어로 인터뷰를 마치고, 제차례가 왔는데, 저는 평이한 질문이었습니다. 언제처음만났냐, 어디서 살았냐, 무슨일 하냐 등등... 그래서 어려움없이 마치고 통과됐다는 결과와 함께 패키지가 우편으로 갈거라고 그거는 절대 열지말고 미국입국할때 제출하면 된다고 안내받고 돌아왔습니다. 

드디어 우편으로 큼지막한 노란서류봉투에 제이름이 박혀져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슬슬 미국갈준비를 하며 정리랄것도 없지만, 조만간 돌아오겠다는 인사를 하며,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2016년 말에 와서... 물론 부모님집에 얹혀 살았습니다 역시... 그리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었지만, 생각보다 영어가 잘 안되서 우울하게 거의 1년을 무직으로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물론 몸은 편했지만, 그 이상으로 정신적으로, 눈치도 엄청 보이고.. 운전이라도 열심히 배워놨으면 뭐라도 도움이 됐을것을... 진짜 지금생각하면 왜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면허따는것도 너무 두려워서 나중에 나중에만 말하며 미뤘습니다.  

indeed.com, monter

그래도 한가지 포기 안한건 일자리 찾는거... 그거라도 포기하면 안될거같았습니다. 그래서 미국현지 회사들만 찾아보다가, 문득 생각이 든것이, 한인 커뮤니티를 찾아보자!!  그래서 찾아봤는데, 그당시에는 진짜 신세계 같았습니다. 한국에서만 보던 대기업들이 미국현지에서 구인을 하고있고, 현지 한국계회사들도 너무 많고... 그래서 넣을수 있는 곳은 다 넣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계 은행.. 한국에서는 거의 탑에 있는 은행에서 면접보자고 연락이 왔고, 열심히 준비...는 안했지만 인터뷰는 최선을 다해서 봤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첫 Job offer를 받았습니다. 

그게 미국에서의 첫 직장이었고, 질긴 한국계회사와의 첫인연이었습니다.

여러가지 많은 에피소드가 많지만.. 기회가 되면 차근차근 나중에 풀어보도록하겠습니다.

저는 절대 운명을 믿었습니다. 꿈같이 예쁜 사람이 나타나서 행복하게 살것이라고 중학교 때부터 언제나 꿈꿔왔었습니다. 물론 그당시에는 중2병부터 시작을 했었지만, 중2병 이후에도 되지도 않는 사람을 좋아하기도하면서 꿈을 꾸기도 했었습니다. 하나하나 나열하면 정말 끝도 없는 사연이 있지만.. 그당시 가장 좋아했던 게임이 파이널판타지8 이라는 JRPG 게임이었는데, 그 스토리를 내 인생에 감정 이입하며 오타쿠같은 생각이었고, 그당시도 오타쿠같다는걸 알고있었지만, 그럼 꿈같은 스토리를 꿈꿨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며 되는 것이 하나도 없고, 공부 자체도 따라갈수없을정도로 어렵고, 같은과목 3학기 연속으로 F를 맞으며(물론 다른많은 과목들도...) 아웃사이더루저가 되어버렸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나이를 먹었으면서 아직 고딩인 동생보다도 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지 못하는 인생이었습니다. 게다가, 알바를 몇번했는데, 하다가 끈기없이 1달, 아니면 1달도 못채우고 그만두기를 반복하다가 그마저도 그냥 포기해버리고... 그것 때문인지 몸에서도 그렇고 특히 머리가 많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 힘들게 일하시고, 언제나 기도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도, 미안하지만, 내 인생은 여기까지 인거같다고 혼자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때의 좌절한 감정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느끼고있지만, 글재주가 없어 제대로 전달될지 모르겠네요..

저는 인생을 어떻게 풀어가야할지 몰랐습니다. 우리집이 가난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똑똑하지 못해서 남들만큼도 못하고, 잘난외모가 있는게 아니라서 할수있는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만하다가... 밤이 되고, 새벽이되고, 동이틀무렵 졸릴때 누워서 자기전에 항상 

 

제발 내일은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지금 자면 영원히 자게해주세요...

 

이제 그만 눈뜨게 해주세요...

 

나때문에 가족이 더 힘들지 않게 해주세요...

 

라고..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심각하고 깊은 우울증에 빠져있었던거같았습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 이 삶을 그만할 수있을까하고 끊임없이 10년 가까이 그렇게 살았던가같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나약하고 겁이많아 스스로 삶을 끊을수 조차도 없다고 자책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입영통지서가 나와 훈련소 입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공익판정을 받아 친구들은 부러워하기도 했었습니다. 현역과는 다르게 4주 훈련만 짧게 받고 마치는 과정이었지만, 그 짧은 4주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지는 않았어도 사는것이 무엇인가라는것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마음이 생겼었습니다. 나와 같은 삶이 아닌, 금수저도 있었고, 열심히 여러가지 일을하며 살아온 사람도있었고... 등등..

저는 영등포역에서 근무를 했는데, 하면서 나쁜짓도 몇번했고 사람도 때려보고 후회도해보고 또 뒤늦게나마 인생에 대해서 배울수 있었습니다. 

또 한번은 내 인생에 새로운 길을 열어준 사람도 만나고.. 결국은 제대로 제대하고 학교를 다시 복학하여, 이번엔 제대로 했습니다. 평점 1.6/4.5를  매꾸기는 쉽지 않았지만, 평점 B로 마칠수있었고, 운이 좋게 캐나다 밴쿠버로 국비 장학생으로 어학연수 및 인턴쉽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국비장학생으로 뽑힐수 있었는지는 나중에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

그래서 결혼얘기는 언제 나오냐 하실수도있겠지만, 현재 아내를 처음 만난것은 밴쿠버에서 만났습니다. 물론 아내는 한국인이 아닌 대만계 미국인이었고, 밴쿠버에는 한국어 공부를 하러왔다고 했습니다.(솔직히 이해는 안가지만..)

하지만 그 당시에는 연애를 하거나 이런게 아닌 그저 외국인 친구, 내짧은 영어를 써먹을수있는 그런 친구들을 만나는것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그 과정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저~~~끝자락 요즘말하는 소위 좋소기업, 갑 을 병 이라고 하는 위치로 따지자면, 이나 에 위치해 있는 회사에 입사를 하고, 월화수목금금금, 추석따윈없는, 야근수당, 휴일수당도 다 월급에 이미 포함된 SI개발회사에 입사를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ㅈ같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너무나 좋은 분들이었고, 많은 것을 배워서 지금까지 같은 업계에서 계속일을 해올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뭐.. 그건그렇다치고,.. 좋소경험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어쨌든, 

물론 밴쿠버에서 만났던 친구들이랑은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는 있었는데, 갑자기 밴쿠버에서 만났던 그 여자애가 한국으로 놀러온다고, 저한테 같이 다녀줄수있냐고 물어보는거였습니다. 그래서 마침 그당시 프로젝트도 끝났고 대표님에게 2주 휴가를 허락맡고, 공항으로 마중나가서 같이 여기저기 구경하며 돌아다녔습니다. 좋은 구경을 시켜줘야한다는 사명감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다녔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거기에 어떻게 하다보니 손도잡고 다니고... 이렇게 서로 좋아하게 되어 누구보다 먼 롱디..한국과 미국..를 시작했습니다... 왔다갔다 하기를 1년... 갑자기 그 여자애가 한국에와서 그냥 혼인신고를 해버리자고....처음에는 그냥 장난으로 하는말인줄알았는데..... 

솔직히 돈도 없고, 그나마 모아두기시작한 돈도 비행기값으로 다 써버리고, 모든 생각이 머리속을 가득채우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한가지, 에라 모르겠다. 

그러고 그날 그냥 혼인신고서 준비해서 친구부부에게 증인사인도받고 종로구청에가서 신고해버렸습니다....물론 어머니 와 동생에게 이야기하고.. 아니 그냥 선언하고... 물론 장인 장모님께는 아직....못했었지만...

그리고 아직까지 결혼식을 못했습니다. 안정되고 자리잡으면 할계획이었는데, 여러가지로 안정이 아직까지도 안되었네요. 

솔직히 인생 별거 없는거 같애요. 그렇게 긴시간을 죽고싶다는 생각을하며 살아왔는데, 특별하지도 않는 계기로 모든게 다 바뀌어버리고. 

제가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공유하는 이유는 그냥 이런 별거 없는 남자도 어찌어찌 살아왔는데, 그리고 운이 좋게 좋은 회사다니며 살아가는데, 저와는 비교도 안돼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려 노력하고, 부모님과 형제자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애를쓰는 젊은 청춘들이 포기 하기 말라고... 딱 그 부분만 이겨내면 이전거는 힘들었던 추억이 될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빠져나갈 구멍은있어요. 너무 힘들다면 주변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아보세요. 아니면 저라도 들어드릴게요. 절대 모든것을 혼자 해결하려 하지마세요. 그게 제가 했던 제일 멍청하고 바보같은 일이었던거같아요. 친구도 그렇고, 부모님, 아니면 정부가 제공하는 상담이라도. 

다음번엔 다른 이야기를 준비해볼게요. 재미는 없겠지만, 이래뵈도 중2병 시절엔 문학작가가 꿈이었습니다.....

 

 

 

 

 

 

취업, 코로나19 등 때문에 힘들어하는 20대 초중반 청년들의 이야기들을 보고 이제 점점 꼰대의 나이가 되어가는 저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해봅니다. 한번 읽어봐주세요. 

두번의 대입수험을 실패하고 모든 끊을 놓고 그냥 이세상 어떻게 살아갈까 했습니다. 내 주제에 대학은 무슨 대학,, 일이나 찾아볼까했는데,, 초등학교 졸업인 어머니가 "어디 전문대가 좋다더라 거기한번 넣어봐." 라고 안타깝게 말씀하실때, 저는 그냥 다 포기한상태로 대학은 무슨 대학이냐 돈만비싸고 소용도 없다라고 신경질만 부리고... 하지만 어머니는 " 쓰잘데기 없는이야기 하지 말고 빨리 넣어봐" 닥달하시고 화를 내셔서 떠밀려 찾아보니 모집은 가능하더라구요.. 그래서 컴퓨터공학과로 지원을 해보았는데, 합격이 아니었어요. 대기번호 4번인가..그랬었는데 여기에서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전문대학도 한번에 합격할 수도 없는 인생이라니... 결국 대기번호가 빨라서 합격통지가 왔는데, 왜그렇게 슬프던지 혼자 이불밑에서 엉엉 소리내서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뭔가 안도의 감정이었는지, 슬픈 감정이었는지 잘 기억은 안나네요. 

하지만 이과에 전혀 소질이 없었던 저는 컴퓨터 공학관련 과목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C언어가 있다는데 그게 컴퓨터가 사용하는 언어라고 그러고, 알고리즘을 알아야 된다는데 중학교 수학시간 때 배웠던 순서도를 그리라고 그러고.... 그래서 힘들게 등록금을 내주신 어머니에게 죄송했지만, 여전히 인생은 암울하고, 우울하고, 이핑계 저핑계 대며 수업을 항상 안나갔었습니다. 심지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때도 시간을 못맞춰서 F를 여러개 맞고 평점은 1.6/4.5였던기억이 납니다. 

그때 가장 기다렸던 시간은 자려고 눈을 감는 그 순간... 왜냐하면 이 눈을 감고 다음날 안떳으면 좋겠다... 이제 앞으로 그만 일어나고 싶다라고 혼자 그렇게 절실하게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침에 눈을 뜨게되면, 아... 오늘도 다시 시작이구나 라며 시작을 했었습니다. 

저는 1학기 다니고 1년 휴학 1학기 다니고 1년 휴학, 그리고 다시 1학기를 다녔습니다. 시간낭비도 정말 많이 했었습니다.. 게다가 딱히 알바를 한것도 없습니다. 그냥 다음날 눈뜨지 않기를 기도하며, 그냥 온라인게임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와 여동생이 얼마나 속이 답답했을까 가늠할수도 없을만큼 부끄럽고, 너무나 죄스럽습니다. 

그때 마침, 제가 훈련소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견갑관절불안정성 진단으로 인한 4급 판정으로 공익근무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근무지역은 영등포역이었는데, 처음에는 적응이 좀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직원들이 해야하는 서비스업무를 공익들이 다하고 영등포에는 노숙자들이 많이 주변관리도 해야했었습니다. 하지만 한달, 두달 사람들과 알아가면 노숙자들도 익숙해지고하며, 뭔가 마음속에 이전에 없었던 깡이라고 할까.. 그런 것들이 생겼던거같아요. 특히나 시비거는 노숙자들을 상대해야했고, 그보다 더 악질이 이유없이 시비거는 지하철 이용자들...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인생을 바라보는 시점이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내 인생뿐아니라, 남의 인생또한... 

그 이후에 병무청 및 철도공사에 때를 써서 공익끝나기 한 2달전, 휴가를 몰아쓰며 학교에 다시 복학을 했는데, 이전에 다녔던 것과 정말 달랐습니다. 이전엔 내가 못알아듣던게 아니라 내가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았던것 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겨우겨우 평점1점대에서 3점대로 평균 B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캐나다로 갈수 있는기회가 생겨, 국비장학생으로 1학기를 어학연수 및 인턴쉽 체험도 다녀올기회도 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개발자로 잘나가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나마 남들이 다 알만한 회사를 다니며 토끼같은 딸을 낳고 친구, 친척 없이 외롭지만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두서없이 여러가지를 이야기 했지만, 뭔가 도움이 될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아무도 안보는 블로그에라도 글을 남겨봅니다. 저도 20대 초 중 후반까지의 기억과 힘들었던 경험이 생생한데 벌써 30대 후반으로 넘어가고 있네요.. 

15년간 출산대책 225조를 썻다는데, 이런 힘든 상황들을 보면 역시나 저런건 그냥 말뿐이고 그저 해처먹을 놈들만 다 해처먹을 뿐이라는 생각만드네요....결국 힘겨워하는 청년들이 헬조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데, 그 헬조선이라는 말이 나온지 꽤 되었는데, 그 말을 처음썼던 청년들이 결혼할 나이가 되고, 아이를 키울 나이가되어서도 아직까지도 헬조선이라고 하는데, 누가 결혼할 여유가 있고, 아이낳을 여유는 더더욱 없어지겠죠.. 

저만해도 딸이 태어났을때 기쁘기도하고 행복하기도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이 힘든세상 아빠가 어떻게 지켜줄수있을까 너무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친구들이 "그래도 너는 헬조선 벗어나는데 성공했구나" 라고 말하곤합니다.

제가 돈이 없어서 물질적으로 보태줄 능력이 있는건 아니지만, 여러가지 방법을 찾아서 할수 있는 것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물론 이글을 마지막까지 읽을 분이 있을지 의문이지만...

저는 나름 프로그램 개발을 하며 먹고살고 있고, 누군가를 조금은 도와줄 만큼의 능력은 있습니다. 

웹사이트라던가, 앱, 아니면 게임 프로그래밍 등.. 아니면 미국으로 인턴으로 올수있는 방법등등... 뭐든 물어보시면 제 주변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자세히 알아봐드릴수있습니다. 참고로 미국에 인턴으로 와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꽤있어서 생생한 정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인생 별거 없습니다. 하지만 별거 없으니 할건 다해봐야지요. 남들 다 하는 결혼도 해보고, 남들다 하는 애기도 낳아보고.. 

그리고 솔직히 결혼생활도 너무 힘들고 애기 낳아서 갓난애기부터 새벽부터 기저귀갈아주고 하는것도 힘들긴한데, 저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꼭 해보세요. 

그냥 사는 거 진짜 별거 없어요. 내 주위를 먼주 둘러보고, 내 밑을 한번쭉 훑어보세요. 

그래도 힘들다면 저한테 얘기하세요, 제가 커피한잔 사드릴게요. 

 

 

 

접이식 키보드로 버티다가 결국 하나 질렀습니다. 

어떤걸로 사야할지 고민을 하다가 여기저기 검색으로 해보니 키포인트와 여러가지 성능을 종합했을때, 키크론 K4가 괜찮은 키보드중 하나로 추천이 되었길래 결정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살까 고민을 하다가 아마존에 새로운 이메일계정으로 가입을 하여 프라임30일 체험판으로 구매를 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택배나 배달이 이미 잘 되어있으니 따로 아마존 프라임같은 서비스가 필요없으니.. 

어쨌든.. 프라임계정으로 2일 무료배송으로 85불을 주고 구매를 하였습니다. 

월요일이긴 하지만 President day라 회사는 휴일이었는데 다행이 일하기 전에 와서 다행입니다. 

기계식 흑축이나 갈축을 살고싶긴했는데 청/적 중에 하나밖에 없어서 적을 선택하긴했습니다. 

막상써보니 청축보다는 소리가 좀 덜하긴 하지만, 조금 시끄러운 것은 마찬가지 인듯...

박스를 들었을땐 꽤나 묵직... 알루미늄 바디라서 견고하고 튼튼한거같습니다. 

구성자체는 키보드 본체와 윈도우용 맥용을 위한 교체용 키캡과 교체할 도구 및 케이블.

키보드는 RGB led 를 여러가지 패턴으로 바꿀수도있고 끌수도있습니다.

또한 좋은 점이 블루투스로 연결할때 3개를 한꺼번에 연결이 가능하고 바꿔가며 편리하게 사용이 가능합니다. 

또한 운영체제에 따라 alt버튼이나 command 버튼을 기계식으로 스위칭이 가능해서 요 기능도 정말 꿀이었네요. 

눌리는 키감과 타격감도 정말 좋긴하네요...

한가지 단점은 키보드 자체가 높아서 손목받침대가 필요할거같긴합니다. 저는 임시로 적당히 작은 수첩으로 받치고 사용하고 있는데, 확실히 손목 받침대 필요합니다.

또 다른거 사게 되면 리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3년과정의 대학을 정말 오래 다녔습니다.  졸업하는데 7년이 걸렸습니다.

물론 운이 좋아서 캐나다로 어학연수겸 인턴으로 유학할 기회도 있었습니다. 이후,  전공인 컴퓨터공학을 계속 할수있을지 스스로의 실력에 의문을 가졌지만, 여기저기 이력서를 만들어서 제출하였었습니다.

첫번째로 연락이 온 곳이 김포에 있는 중견 부품회사였습니다. 물론 건실한기업이었고, 미래도 밝은 회사였지만 출퇴근이 문제였습니다.

아침엔 무조건 5시에 일어나서 셔틀버스가 서는 곳으로 가서 기다려야했습니다. 만약에 놓치기라도하면 그 먼거리를 택시를 타고 가야했기에... 그래도 3년제를 7년동안다니고나서 나이로 여유가 없었다고 생각해서 감사한마음으로 다니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업무시간은 8시30분부터 저녁 6시까지.

퇴근시 통근버스가 있긴했지만 그건 근처 지하철까지만 운영하는 버스였습니다. 그래서 칼퇴근을 하더라도 집에 도착하면 9시에서 10시 사이...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어느날 문득 드는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는 COBOL, Visual Basic 이런 오래된 것들이었고, 아무리 안정적이라 하더라도 출퇴근으로 낭비하는 시간과 좀더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싶다는 생각에 뒷일 생각안하고 3달만에 바로 사직서를 제출...

다시 구직을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좀더 중심부로 나가보자 하여 종로, 강남을 중심으로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강남에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회사가있어서 바로 달려갔습니다. 10명 남짓의 작은 SI 회사였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하고, 곧바로 언제부터 시작할 수있냐는 질문.

조건은 연봉 2000만원에 시간외 수당이 다 포함된 금액이었습니다. 조건은 그렇게 좋진 않았지만, 첫직장이라 생각하고 배우면서 경력이 쌓이면 좋은곳으로 옮겨가자는 결심을하고 바로출근을 시작했습니다.

입사하자마자 프로젝트에 투입이 되었는데 고객사의 갑질로인해 완료시간맞추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래서 도움이 되고자 월 150만원을 받으며, 월, 화, 수, 목, 금, 금, 금, 다시 월요일의 시작... 이런식으로 일을하였습니다. 당시 추석도 겹쳐있었는데,  명절도 없이 다 나가서 일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저렇게 했나 참 그런생각도 들기도하네요.

그 이후, 사람들과 가까워지며 열심히 배우고 다른 프로젝트도 다니며 나름 즐겁게 했었는데,

어떠한 계기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만두었다기보단 사장이 그만두라고 했으니 짤린 셈이 되는 것이지요. 그 이후로는 프리나 계약단위로 프로젝트를 뛰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시간에 다시 이어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루를 살고 았습니다.

높은 확률로 내일도 오늘과 같은 하루를 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오늘과 내일은 같은  날이 아니기에 하루하루는 너무 소중한 시간입니다.

그런 소중한 나날을 살아온 여정을 기록 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나의 인생 여정을 기록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현재 미국 동부에서 프로그래머로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물론 가족 친척 친구들은 모두 한국에 있지만, 미국 시민인 와이프를 만나 미국으로 혼자이민을 오게 되었네요.

얼마전 토끼같은 딸도 하나 생겼습니다.

 

워낙 넓은 미국땅이라 금쪽같은 아내와 딸과 떨어져 잠시 기러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전 직장을 그만두고 코로나의 영향인지 실력이 부족한건지 모르겠지만, 1년정도 백수로 장모님댁에서 지내다가 감사하게도 동부쪽에 직장을 구할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은 잠시 중부 장모님댁에 두고 혼자 동부로 건너왔습니다.

 

이제 일한지 1달이 넘었는데 기본적으로 재택근무에 여러가지 사정이 많아 제대로 된 업무는 아직 못받았고

혼자 이것저것 하면서 반은 놀면서 반은 혼자 업무공부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특별것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극 평험한 이야기를 평범하게 풀어볼 생각입니다.

이 이야기들이 나중엔 나를 스스로 추억하는 글이 될수도있고, 나의 가족들이 나를 기억하게 할수도 있을거같습니다.

 

별거 없는 인생이지만 나름 많은 회사와 일을 겪은 경험들부터 풀어볼 예정입니다.

희망도 꿈도 없는 인생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눈앞에일을 해쳐나아가다보니 현재는 나름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볼품없고, 재미도 없는 이야기 이겠지만 한번 기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에서의 마음의 고향이었던 미네소타에서의 취업을 실패하고 결국엔 새로운 일을 찾아 동부로 돌아왔습니다. 새로운 곳은 뉴저지 동쪽 끝 맨해튼과 맞닿은곳.. 저는 나무가 많고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살아가고 싶었는데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결국 하나도 없는거 같습니다. 

물론 지금 찾은 기회가 좋은기회가 될 수도 있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는 것이 안되서 조금 답답한것이 있습니다. 

게다가 더 답답한것은 아내와 아기는 아직 미네소타에 있고 혼자 와있다보니 아직 며칠 안됐지만, 외로움이 더 느껴지고 힘이 들다고 느껴지는거 같네요. 

이제 첫 출근은 12월 1일로 하게 되어있고 다행이 회사근처에 룸쉐어로 해서 하나 방을 얻어서 한시름 놓았지만 그래도 가족들이 보고싶은건 어쩔수없네요. 

그래서 현재 감정들을 좀 없애기 위해 여러가지 일을 기획을 하는 시간을 갖을 수있을거같습니다. 

현재 기획하는 것으로는 

1. 미국에서 취업/생활하기 관련 도움말

2. 코딩관련 동영상

3. 유투버로서 제대로 된 데뷔

4. 개인사업 진행

지금 요정도가 현재 구상중인 계획인거같네요. 물론 하나하나 쉽지않고 많은 자료 및 노력이 들어가겠지만, 뭐 나름대로 괜찮을거같습니다.

간만에 글을 하나 올려봅니다. 지난번 뉴저지에서의 실패한 이후로, 다시는 동쪽끝이나 서쪽끝으로 이사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건만 거의 1년가까이 직장없이 장모님댁에 얹혀 살다보니 점점 절박해지는 것은 어쩔수 없었네요. 그리고 한가지 다짐했던것은 한국계회사로는 가지않겠다는 것이었는데, 결국엔 이렇게 다시 동쪽끝 한국계회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미네소타 로컬회사 인터뷰후 결과를 기다렸는데 결국 안됐다고 연락이 왔네요. 그래서 어쩔수 없이 이 코로나 시국에 비행기를 타고 동쪽끝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현재 애기도 15개월째로 한참 말배우며 따따~라고 아빠를 부르며 안아달라고 보채는데 눈밟혀 마음이 너무 착잡하네요. 

어쨌든 가장으로서 일을 해야하고 가족으로 책임지기 위해 일을 해야하니 가게 되었습니다. 

미네소타를 마지막 정착지로 생각하고 남은 30년을 일을하며 조용한동네에서 살아가고 싶었지만 어쩔수가 없네요. 

그래도 뉴저지도 한적하고 안전하고 조용한동네가 많아서 아기랑 살 수있는 동네를 잘 찾아봐야겠네요.

이번 포스팅 이후에는 한번 미국에서 직장을 잡는것에 대해 자세하고 시리즈로 한번 올려볼생각입니다. 또한 유툽으로 영상을 제작해서 한번 올려봐야겠습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한국에서사나, 미국에서사나 결국엔 사람사는곳은 다 똑같다입니다. 그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나 그게 가장 중요한 조건인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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