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절대 운명을 믿었습니다. 꿈같이 예쁜 사람이 나타나서 행복하게 살것이라고 중학교 때부터 언제나 꿈꿔왔었습니다. 물론 그당시에는 중2병부터 시작을 했었지만, 중2병 이후에도 되지도 않는 사람을 좋아하기도하면서 꿈을 꾸기도 했었습니다. 하나하나 나열하면 정말 끝도 없는 사연이 있지만.. 그당시 가장 좋아했던 게임이 파이널판타지8 이라는 JRPG 게임이었는데, 그 스토리를 내 인생에 감정 이입하며 오타쿠같은 생각이었고, 그당시도 오타쿠같다는걸 알고있었지만, 그럼 꿈같은 스토리를 꿈꿨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며 되는 것이 하나도 없고, 공부 자체도 따라갈수없을정도로 어렵고, 같은과목 3학기 연속으로 F를 맞으며(물론 다른많은 과목들도...) 아웃사이더루저가 되어버렸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나이를 먹었으면서 아직 고딩인 동생보다도 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지 못하는 인생이었습니다. 게다가, 알바를 몇번했는데, 하다가 끈기없이 1달, 아니면 1달도 못채우고 그만두기를 반복하다가 그마저도 그냥 포기해버리고... 그것 때문인지 몸에서도 그렇고 특히 머리가 많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 힘들게 일하시고, 언제나 기도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도, 미안하지만, 내 인생은 여기까지 인거같다고 혼자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때의 좌절한 감정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느끼고있지만, 글재주가 없어 제대로 전달될지 모르겠네요..

저는 인생을 어떻게 풀어가야할지 몰랐습니다. 우리집이 가난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똑똑하지 못해서 남들만큼도 못하고, 잘난외모가 있는게 아니라서 할수있는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만하다가... 밤이 되고, 새벽이되고, 동이틀무렵 졸릴때 누워서 자기전에 항상 

 

제발 내일은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지금 자면 영원히 자게해주세요...

 

이제 그만 눈뜨게 해주세요...

 

나때문에 가족이 더 힘들지 않게 해주세요...

 

라고..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심각하고 깊은 우울증에 빠져있었던거같았습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 이 삶을 그만할 수있을까하고 끊임없이 10년 가까이 그렇게 살았던가같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나약하고 겁이많아 스스로 삶을 끊을수 조차도 없다고 자책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입영통지서가 나와 훈련소 입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공익판정을 받아 친구들은 부러워하기도 했었습니다. 현역과는 다르게 4주 훈련만 짧게 받고 마치는 과정이었지만, 그 짧은 4주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지는 않았어도 사는것이 무엇인가라는것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마음이 생겼었습니다. 나와 같은 삶이 아닌, 금수저도 있었고, 열심히 여러가지 일을하며 살아온 사람도있었고... 등등..

저는 영등포역에서 근무를 했는데, 하면서 나쁜짓도 몇번했고 사람도 때려보고 후회도해보고 또 뒤늦게나마 인생에 대해서 배울수 있었습니다. 

또 한번은 내 인생에 새로운 길을 열어준 사람도 만나고.. 결국은 제대로 제대하고 학교를 다시 복학하여, 이번엔 제대로 했습니다. 평점 1.6/4.5를  매꾸기는 쉽지 않았지만, 평점 B로 마칠수있었고, 운이 좋게 캐나다 밴쿠버로 국비 장학생으로 어학연수 및 인턴쉽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국비장학생으로 뽑힐수 있었는지는 나중에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

그래서 결혼얘기는 언제 나오냐 하실수도있겠지만, 현재 아내를 처음 만난것은 밴쿠버에서 만났습니다. 물론 아내는 한국인이 아닌 대만계 미국인이었고, 밴쿠버에는 한국어 공부를 하러왔다고 했습니다.(솔직히 이해는 안가지만..)

하지만 그 당시에는 연애를 하거나 이런게 아닌 그저 외국인 친구, 내짧은 영어를 써먹을수있는 그런 친구들을 만나는것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그 과정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저~~~끝자락 요즘말하는 소위 좋소기업, 갑 을 병 이라고 하는 위치로 따지자면, 이나 에 위치해 있는 회사에 입사를 하고, 월화수목금금금, 추석따윈없는, 야근수당, 휴일수당도 다 월급에 이미 포함된 SI개발회사에 입사를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ㅈ같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너무나 좋은 분들이었고, 많은 것을 배워서 지금까지 같은 업계에서 계속일을 해올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뭐.. 그건그렇다치고,.. 좋소경험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어쨌든, 

물론 밴쿠버에서 만났던 친구들이랑은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는 있었는데, 갑자기 밴쿠버에서 만났던 그 여자애가 한국으로 놀러온다고, 저한테 같이 다녀줄수있냐고 물어보는거였습니다. 그래서 마침 그당시 프로젝트도 끝났고 대표님에게 2주 휴가를 허락맡고, 공항으로 마중나가서 같이 여기저기 구경하며 돌아다녔습니다. 좋은 구경을 시켜줘야한다는 사명감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다녔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거기에 어떻게 하다보니 손도잡고 다니고... 이렇게 서로 좋아하게 되어 누구보다 먼 롱디..한국과 미국..를 시작했습니다... 왔다갔다 하기를 1년... 갑자기 그 여자애가 한국에와서 그냥 혼인신고를 해버리자고....처음에는 그냥 장난으로 하는말인줄알았는데..... 

솔직히 돈도 없고, 그나마 모아두기시작한 돈도 비행기값으로 다 써버리고, 모든 생각이 머리속을 가득채우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한가지, 에라 모르겠다. 

그러고 그날 그냥 혼인신고서 준비해서 친구부부에게 증인사인도받고 종로구청에가서 신고해버렸습니다....물론 어머니 와 동생에게 이야기하고.. 아니 그냥 선언하고... 물론 장인 장모님께는 아직....못했었지만...

그리고 아직까지 결혼식을 못했습니다. 안정되고 자리잡으면 할계획이었는데, 여러가지로 안정이 아직까지도 안되었네요. 

솔직히 인생 별거 없는거 같애요. 그렇게 긴시간을 죽고싶다는 생각을하며 살아왔는데, 특별하지도 않는 계기로 모든게 다 바뀌어버리고. 

제가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공유하는 이유는 그냥 이런 별거 없는 남자도 어찌어찌 살아왔는데, 그리고 운이 좋게 좋은 회사다니며 살아가는데, 저와는 비교도 안돼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려 노력하고, 부모님과 형제자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애를쓰는 젊은 청춘들이 포기 하기 말라고... 딱 그 부분만 이겨내면 이전거는 힘들었던 추억이 될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빠져나갈 구멍은있어요. 너무 힘들다면 주변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아보세요. 아니면 저라도 들어드릴게요. 절대 모든것을 혼자 해결하려 하지마세요. 그게 제가 했던 제일 멍청하고 바보같은 일이었던거같아요. 친구도 그렇고, 부모님, 아니면 정부가 제공하는 상담이라도. 

다음번엔 다른 이야기를 준비해볼게요. 재미는 없겠지만, 이래뵈도 중2병 시절엔 문학작가가 꿈이었습니다.....

 

 

 

 

 

 

취업, 코로나19 등 때문에 힘들어하는 20대 초중반 청년들의 이야기들을 보고 이제 점점 꼰대의 나이가 되어가는 저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해봅니다. 한번 읽어봐주세요. 

두번의 대입수험을 실패하고 모든 끊을 놓고 그냥 이세상 어떻게 살아갈까 했습니다. 내 주제에 대학은 무슨 대학,, 일이나 찾아볼까했는데,, 초등학교 졸업인 어머니가 "어디 전문대가 좋다더라 거기한번 넣어봐." 라고 안타깝게 말씀하실때, 저는 그냥 다 포기한상태로 대학은 무슨 대학이냐 돈만비싸고 소용도 없다라고 신경질만 부리고... 하지만 어머니는 " 쓰잘데기 없는이야기 하지 말고 빨리 넣어봐" 닥달하시고 화를 내셔서 떠밀려 찾아보니 모집은 가능하더라구요.. 그래서 컴퓨터공학과로 지원을 해보았는데, 합격이 아니었어요. 대기번호 4번인가..그랬었는데 여기에서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전문대학도 한번에 합격할 수도 없는 인생이라니... 결국 대기번호가 빨라서 합격통지가 왔는데, 왜그렇게 슬프던지 혼자 이불밑에서 엉엉 소리내서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뭔가 안도의 감정이었는지, 슬픈 감정이었는지 잘 기억은 안나네요. 

하지만 이과에 전혀 소질이 없었던 저는 컴퓨터 공학관련 과목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C언어가 있다는데 그게 컴퓨터가 사용하는 언어라고 그러고, 알고리즘을 알아야 된다는데 중학교 수학시간 때 배웠던 순서도를 그리라고 그러고.... 그래서 힘들게 등록금을 내주신 어머니에게 죄송했지만, 여전히 인생은 암울하고, 우울하고, 이핑계 저핑계 대며 수업을 항상 안나갔었습니다. 심지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때도 시간을 못맞춰서 F를 여러개 맞고 평점은 1.6/4.5였던기억이 납니다. 

그때 가장 기다렸던 시간은 자려고 눈을 감는 그 순간... 왜냐하면 이 눈을 감고 다음날 안떳으면 좋겠다... 이제 앞으로 그만 일어나고 싶다라고 혼자 그렇게 절실하게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침에 눈을 뜨게되면, 아... 오늘도 다시 시작이구나 라며 시작을 했었습니다. 

저는 1학기 다니고 1년 휴학 1학기 다니고 1년 휴학, 그리고 다시 1학기를 다녔습니다. 시간낭비도 정말 많이 했었습니다.. 게다가 딱히 알바를 한것도 없습니다. 그냥 다음날 눈뜨지 않기를 기도하며, 그냥 온라인게임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와 여동생이 얼마나 속이 답답했을까 가늠할수도 없을만큼 부끄럽고, 너무나 죄스럽습니다. 

그때 마침, 제가 훈련소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견갑관절불안정성 진단으로 인한 4급 판정으로 공익근무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근무지역은 영등포역이었는데, 처음에는 적응이 좀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직원들이 해야하는 서비스업무를 공익들이 다하고 영등포에는 노숙자들이 많이 주변관리도 해야했었습니다. 하지만 한달, 두달 사람들과 알아가면 노숙자들도 익숙해지고하며, 뭔가 마음속에 이전에 없었던 깡이라고 할까.. 그런 것들이 생겼던거같아요. 특히나 시비거는 노숙자들을 상대해야했고, 그보다 더 악질이 이유없이 시비거는 지하철 이용자들...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인생을 바라보는 시점이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내 인생뿐아니라, 남의 인생또한... 

그 이후에 병무청 및 철도공사에 때를 써서 공익끝나기 한 2달전, 휴가를 몰아쓰며 학교에 다시 복학을 했는데, 이전에 다녔던 것과 정말 달랐습니다. 이전엔 내가 못알아듣던게 아니라 내가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았던것 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겨우겨우 평점1점대에서 3점대로 평균 B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캐나다로 갈수 있는기회가 생겨, 국비장학생으로 1학기를 어학연수 및 인턴쉽 체험도 다녀올기회도 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개발자로 잘나가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나마 남들이 다 알만한 회사를 다니며 토끼같은 딸을 낳고 친구, 친척 없이 외롭지만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두서없이 여러가지를 이야기 했지만, 뭔가 도움이 될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아무도 안보는 블로그에라도 글을 남겨봅니다. 저도 20대 초 중 후반까지의 기억과 힘들었던 경험이 생생한데 벌써 30대 후반으로 넘어가고 있네요.. 

15년간 출산대책 225조를 썻다는데, 이런 힘든 상황들을 보면 역시나 저런건 그냥 말뿐이고 그저 해처먹을 놈들만 다 해처먹을 뿐이라는 생각만드네요....결국 힘겨워하는 청년들이 헬조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데, 그 헬조선이라는 말이 나온지 꽤 되었는데, 그 말을 처음썼던 청년들이 결혼할 나이가 되고, 아이를 키울 나이가되어서도 아직까지도 헬조선이라고 하는데, 누가 결혼할 여유가 있고, 아이낳을 여유는 더더욱 없어지겠죠.. 

저만해도 딸이 태어났을때 기쁘기도하고 행복하기도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이 힘든세상 아빠가 어떻게 지켜줄수있을까 너무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친구들이 "그래도 너는 헬조선 벗어나는데 성공했구나" 라고 말하곤합니다.

제가 돈이 없어서 물질적으로 보태줄 능력이 있는건 아니지만, 여러가지 방법을 찾아서 할수 있는 것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물론 이글을 마지막까지 읽을 분이 있을지 의문이지만...

저는 나름 프로그램 개발을 하며 먹고살고 있고, 누군가를 조금은 도와줄 만큼의 능력은 있습니다. 

웹사이트라던가, 앱, 아니면 게임 프로그래밍 등.. 아니면 미국으로 인턴으로 올수있는 방법등등... 뭐든 물어보시면 제 주변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자세히 알아봐드릴수있습니다. 참고로 미국에 인턴으로 와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꽤있어서 생생한 정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인생 별거 없습니다. 하지만 별거 없으니 할건 다해봐야지요. 남들 다 하는 결혼도 해보고, 남들다 하는 애기도 낳아보고.. 

그리고 솔직히 결혼생활도 너무 힘들고 애기 낳아서 갓난애기부터 새벽부터 기저귀갈아주고 하는것도 힘들긴한데, 저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꼭 해보세요. 

그냥 사는 거 진짜 별거 없어요. 내 주위를 먼주 둘러보고, 내 밑을 한번쭉 훑어보세요. 

그래도 힘들다면 저한테 얘기하세요, 제가 커피한잔 사드릴게요. 

 

 

 

저는 3년과정의 대학을 정말 오래 다녔습니다.  졸업하는데 7년이 걸렸습니다.

물론 운이 좋아서 캐나다로 어학연수겸 인턴으로 유학할 기회도 있었습니다. 이후,  전공인 컴퓨터공학을 계속 할수있을지 스스로의 실력에 의문을 가졌지만, 여기저기 이력서를 만들어서 제출하였었습니다.

첫번째로 연락이 온 곳이 김포에 있는 중견 부품회사였습니다. 물론 건실한기업이었고, 미래도 밝은 회사였지만 출퇴근이 문제였습니다.

아침엔 무조건 5시에 일어나서 셔틀버스가 서는 곳으로 가서 기다려야했습니다. 만약에 놓치기라도하면 그 먼거리를 택시를 타고 가야했기에... 그래도 3년제를 7년동안다니고나서 나이로 여유가 없었다고 생각해서 감사한마음으로 다니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업무시간은 8시30분부터 저녁 6시까지.

퇴근시 통근버스가 있긴했지만 그건 근처 지하철까지만 운영하는 버스였습니다. 그래서 칼퇴근을 하더라도 집에 도착하면 9시에서 10시 사이...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어느날 문득 드는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는 COBOL, Visual Basic 이런 오래된 것들이었고, 아무리 안정적이라 하더라도 출퇴근으로 낭비하는 시간과 좀더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싶다는 생각에 뒷일 생각안하고 3달만에 바로 사직서를 제출...

다시 구직을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좀더 중심부로 나가보자 하여 종로, 강남을 중심으로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강남에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회사가있어서 바로 달려갔습니다. 10명 남짓의 작은 SI 회사였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하고, 곧바로 언제부터 시작할 수있냐는 질문.

조건은 연봉 2000만원에 시간외 수당이 다 포함된 금액이었습니다. 조건은 그렇게 좋진 않았지만, 첫직장이라 생각하고 배우면서 경력이 쌓이면 좋은곳으로 옮겨가자는 결심을하고 바로출근을 시작했습니다.

입사하자마자 프로젝트에 투입이 되었는데 고객사의 갑질로인해 완료시간맞추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래서 도움이 되고자 월 150만원을 받으며, 월, 화, 수, 목, 금, 금, 금, 다시 월요일의 시작... 이런식으로 일을하였습니다. 당시 추석도 겹쳐있었는데,  명절도 없이 다 나가서 일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저렇게 했나 참 그런생각도 들기도하네요.

그 이후, 사람들과 가까워지며 열심히 배우고 다른 프로젝트도 다니며 나름 즐겁게 했었는데,

어떠한 계기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만두었다기보단 사장이 그만두라고 했으니 짤린 셈이 되는 것이지요. 그 이후로는 프리나 계약단위로 프로젝트를 뛰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시간에 다시 이어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루를 살고 았습니다.

높은 확률로 내일도 오늘과 같은 하루를 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오늘과 내일은 같은  날이 아니기에 하루하루는 너무 소중한 시간입니다.

그런 소중한 나날을 살아온 여정을 기록 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나의 인생 여정을 기록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현재 미국 동부에서 프로그래머로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물론 가족 친척 친구들은 모두 한국에 있지만, 미국 시민인 와이프를 만나 미국으로 혼자이민을 오게 되었네요.

얼마전 토끼같은 딸도 하나 생겼습니다.

 

워낙 넓은 미국땅이라 금쪽같은 아내와 딸과 떨어져 잠시 기러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전 직장을 그만두고 코로나의 영향인지 실력이 부족한건지 모르겠지만, 1년정도 백수로 장모님댁에서 지내다가 감사하게도 동부쪽에 직장을 구할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은 잠시 중부 장모님댁에 두고 혼자 동부로 건너왔습니다.

 

이제 일한지 1달이 넘었는데 기본적으로 재택근무에 여러가지 사정이 많아 제대로 된 업무는 아직 못받았고

혼자 이것저것 하면서 반은 놀면서 반은 혼자 업무공부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특별것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극 평험한 이야기를 평범하게 풀어볼 생각입니다.

이 이야기들이 나중엔 나를 스스로 추억하는 글이 될수도있고, 나의 가족들이 나를 기억하게 할수도 있을거같습니다.

 

별거 없는 인생이지만 나름 많은 회사와 일을 겪은 경험들부터 풀어볼 예정입니다.

희망도 꿈도 없는 인생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눈앞에일을 해쳐나아가다보니 현재는 나름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볼품없고, 재미도 없는 이야기 이겠지만 한번 기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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